에디토리얼
K뷰티의 불편한 진실
아무도 말하지 않는 재고에 대하여 — buy.kbeauty.market이 존재하는 이유
한국 화장품 산업에 대해 공개된 숫자는 대부분 수출과 성장에 관한 것이다. 그 숫자들은 사실이다. 다만 같은 산업의 반대쪽 끝, 만들어졌지만 팔리지 않은 물건이 창고에서 사용기한을 잃어가는 쪽에 대해서는 공개된 숫자가 거의 없다. 이 글은 그 빈자리에 흩어져 있는 자료를 모아 읽어본 기록이다.
먼저 이해관계를 밝힌다. 이 글을 쓴 곳은 바로 그 재고의 해외 판매 경로를 검토하는 회사다. 그러니 여기 적힌 문장을 그냥 믿을 필요는 없다. 대신 모든 수치에 출처를 달았고, 페이지 맨 아래에 전부 적어두었다. 읽고 나서 판단하면 된다.
01
삼만 개의 브랜드, 절반의 진실
한국에서 화장품 브랜드를 시작하는 데 공장은 필요하지 않다. 처방과 생산은 ODM 회사가 맡고, 브랜드는 기획과 마케팅과 판매를 가져간다. 제도적으로 갖춰야 하는 것은 화장품책임판매업 등록 하나다. 2025년 말 기준으로 등록된 책임판매업체는 28,412개다. 지난 십여 년 K뷰티가 보여준 속도는 상당 부분 이 구조에서 나왔고, 대체로 좋은 구조였다.
28,412개
등록 화장품책임판매업체 · 2025년 말
93.5%
연 생산실적 10억 원 미만 비중 · 2023년 보고 기준
같은 구조의 다른 면은 규모다. 2023년 생산실적을 보고한 책임판매업체 가운데 93.5%가 연 생산실적 10억 원에 미치지 못했다. 열에 아홉 이상이 소규모 브랜드라는 뜻이고, 소규모 브랜드에는 대개 재고를 오래 버틸 자금도, 안 팔린 물량을 처리할 부서도 없다.
진입 장벽이 낮다는 말은 두 방향으로 읽힌다. 만들기가 쉽다는 뜻이면서, 만든 것이 팔리지 않았을 때 물러설 자리도 그만큼 없다는 뜻이다. ODM은 최소 생산 수량을 요구하고, 그 수량은 브랜드의 판매 예측이 아니라 공장의 생산 단위에서 나온다. 첫 발주가 그대로 첫 재고가 되는 이유다. 어느 창고에나 그렇게 시작된 상자가 있다.
02
2024년, 8,831개의 폐업
2024년 한 해 동안 폐업 처리된 화장품책임판매업체는 8,831개다. 2020년의 폐업 건수와 견주면 약 10배다. 같은 해 등록 업체 수 자체도 처음으로 줄었다. 새로 들어오는 수보다 나가는 수가 많아진 첫 해였다는 뜻이다.
8,831개사
2024년 책임판매업체 폐업
10배
2020년 대비
폐업은 행정 서류상의 사건이다. 등록이 말소되고 통계에 한 줄이 남는다. 서류가 정리해주지 않는 것은 창고다. 브랜드가 문을 닫아도 마지막 발주분은 그대로 남고, 그 물량은 대개 대표 개인이나, 정산이 끝나지 않은 유통사나, 보관료가 계속 나가는 물류 창고에 얹힌 채로 남는다.
정리 국면은 보통 몇 년에 걸쳐 지나간다. 늘어난 브랜드 수가 다시 줄어드는 동안 산업이 실제로 감당해야 하는 것은 폐업 건수가 아니라 폐업이 남기고 간 물건이다. 그 물건은 결함이 있어서 남은 것이 아니다. 대부분은 만들어진 그대로, 미개봉 상태로, 사용기한만 줄어들면서 남아 있다.
03
시계는 12개월에 멈춘다
화장품 재고의 값을 정하는 것은 브랜드도 카테고리도 아니고 남은 시간이다. 유통 관행은 잔여 사용기한을 기준으로 문을 여닫는다. 도매 계약은 대체로 잔여 12개월 이상을 요구하고, 소매 채널은 6개월 밑으로 내려가면 인수 자체를 거절한다. 수출 주문에는 운송과 통관에 걸리는 기간이 더 붙어서, 잔여 300일 이상을 요구하는 경우가 흔하다.
12개월
도매 계약이 요구하는 잔여 사용기한
6개월
소매 인수가 거절되기 시작하는 선
300일
수출 주문이 요구하는 잔여 기한
그래서 '악성 재고'는 제품의 성질이 아니라 날짜의 성질이다. 같은 상자가 어제는 정상 상품이었고, 오늘은 도매가 받지 않는 물건이며, 몇 달 뒤에는 아무도 받지 않는 물건이 된다. 그동안 내용물은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다. 변한 것은 상자 옆면에 인쇄된 날짜와 오늘 사이의 거리뿐이다.
문이 닫히는 순서에는 값이 매겨져 있다. 정상 유통이 끝나면 국내 땡처리 도매가 남는데, 그 시장에서 이야기되는 가격은 대체로 원가의 30% 선이다. 거기서도 거절당한 물량이 마지막에 만나는 것은 폐기 업체이고, 폐기는 돈을 받는 일이 아니라 내는 일이다. 실무에서 언급되는 금액은 파렛트당 20~30만 원 정도다.
04
아무도 말하지 않는다
여기까지는 구조의 이야기다. 이다음부터가 어려운데, 자료가 없기 때문이다. 국내에서 자사 재고를 얼마나 폐기했는지 공개한 화장품 브랜드는 사실상 없다. 보그 코리아가 폐기되는 화장품을 취재하면서 확인한 것도 그것이었다. 질문은 할 수 있지만 답을 듣기는 어렵다.
20~40%
소비자에게 닿지 못하는 뷰티 제품 비율 · 해외 추정
48억 달러
뷰티 브랜드 공급망의 연간 폐기 규모 · 2022년 조사
그래서 남는 것은 해외 추정치다. 생산된 뷰티 제품의 20~40%가 끝내 소비자에게 닿지 못한다는 추정이 있고, 브랜드 공급망 안에서만 한 해 48억 달러어치가 버려진다는 조사가 있다. 한국 시장에 그대로 대입할 수 있는 숫자는 아니다. 다만 만드는 구조가 비슷하다면 남는 구조도 비슷할 것이라고 보는 편이 자연스럽다.
말하지 않는 이유는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재고를 인정하는 것은 수요 예측이 틀렸다고 인정하는 일이고, 얼마에 처분했는지를 밝히는 것은 그 브랜드 제품의 진짜 하한가를 공개하는 일이다. 잉여 재고를 다루는 해외 업체들이 이 영역을 두고 '터부'라는 말을 쓰는 것도 같은 이유에서다. 침묵은 비합리적인 선택이 아니다. 다만 침묵하는 동안에도 사용기한은 계속 줄어든다.
05
법은 이미 움직였다
재고 폐기가 각자의 사정이던 시기는 유럽에서 먼저 끝났다. 프랑스는 AGEC법으로 팔리지 않은 비식품 제품의 폐기를 금지했다. 화장품이 그 대상에 들어가고, 기업은 폐기 대신 기부·재사용·재활용 경로를 택해야 한다. 위반하면 법인 기준 최대 15,000유로의 과태료가 붙는다.
15,000유로
프랑스 AGEC · 미판매품 폐기 금지 위반 시 법인 최대 과태료
EU는 ESPR로 같은 방향을 더 넓게 잡았다. 미판매 의류·신발의 폐기 금지가 먼저 발효되고, 대기업에는 폐기한 미판매품의 양과 처리 방식을 공시할 의무가 생긴다. 화장품은 아직 폐기 금지 품목의 첫 목록에 없다. 다만 공시 의무는 품목을 가리지 않는 방향으로 가고 있고, 첫 목록이 마지막 목록이었던 규제는 드물다.
규제가 움직인 방향은 버리는 쪽만이 아니다. 미국은 2024년 7월부터 MoCRA에 따른 시설 등록과 제품 리스팅 집행을 시작했다. 정리하면 이렇게 된다. 물건을 없애는 데도 서류가 필요해지고 있고, 물건을 내보내는 데도 서류가 필요해지고 있다. 한국에는 아직 미판매품 폐기를 금지하는 법이 없다. 하지만 수출로 먹고사는 산업은 결국 도착지의 규칙을 따라간다. 폐기는 지금까지 비용 항목이었다. 앞으로는 공시 항목이고, 그다음에는 리스크다.
06
그런데 밖에서는 K뷰티가 모자란다
같은 기간, 산업의 반대쪽 끝에서는 정반대의 숫자가 나왔다. 2025년 한국 화장품 수출은 114.2억 달러로 사상 최대였다. 도착지는 202개국이었고, 최대 시장인 미국 한 곳만 21.8억 달러, 전년 대비 15% 늘었다.
114.2억 달러
2025년 화장품 수출 · 사상 최대
202개국
수출 도착지
21.8억 달러
미국 · 최대 시장, 전년 대비 15%
이 두 개의 사실은 한 문장 안에 나란히 놓기가 어색하다. 국내 창고에는 팔리지 않은 화장품이 쌓여 있고, 국경 밖에는 그 화장품을 아직 본 적 없는 시장이 202개 있다. 어색한 이유는 둘 중 하나가 틀려서가 아니라, 둘이 사실은 같은 문제의 양쪽이기 때문이다.
국내에서 팔리지 않았다는 사실이 제품이 나쁘다는 증거인 경우는 생각보다 드물다. 대개는 타이밍이 어긋났거나, 채널이 맞지 않았거나, 그 자리에 이미 비슷한 제품이 너무 많았기 때문이다. 같은 상자가 어떤 창고에서는 처분해야 할 악성 재고이고, 다른 나라에서는 아직 들어온 적 없는 신제품이다. 달라진 것은 제품이 아니라 상자가 놓인 자리다.
재고의 문제는 제품이 아니라 위치다.
출처
숫자가 온 곳
이 페이지에 나오는 수치는 한 곳에 모아두고, 문장은 거기서 값을 가져다 쓴다. 숫자가 고쳐지면 그 숫자를 인용한 문장이 전부 함께 움직인다는 뜻이다. 아래는 그 숫자들이 온 자료다. 조사 시점의 값이고, 실시간 지표가 아니다.
- 01코스모닝 — 대한화장품협회 제77회 정기총회 (책임판매업체 수)https://www.cosmorning.com/news/article.html?no=52185
- 02CNC뉴스 — 2023년 화장품 생산실적 분석 (영세 업체 비중)https://www.cncnews.co.kr/mobile/article.html?no=9561
- 03이코노미코리아 — 책임판매업자 줄폐업 (2024년 폐업 건수)https://kr.economy.ac/news/2025/04/20250434533
- 04REACH24H — 2025 한국 화장품 수출 데이터https://en.reach24h.com/news/insights/cosmetic/south-korea-2025-cosmetics-export-data-insights
- 05Alibaba B2B — 뷰티 셀프라이프·PAO 가이드 (도매 잔여기한 관행)https://seller.alibaba.com/blogs/2026/southeast-asia/beauty-skincare/shelf-life-pao-labeling-guide-alibaba-b2b
- 06Helm WMS — Shelf Life 용어집 (수출 잔여기한 기준)https://helmwms.com/glossary/shelf-life
- 07브런치 — 이커머스 부진 재고를 떨이하는 방법 (폐기 비용·땡처리 실무)https://brunch.co.kr/@aficio1060/7
- 08더스쿠프 — 화곡동 화장품 도매시장 르포http://www.thescoop.co.kr/news/articleView.html?idxno=18239
- 09보그 코리아 — 뷰티의 난제, 폐기되는 화장품https://www.vogue.co.kr/2022/03/28/뷰티의-난제-폐기되는-화장품/
- 10Cosmetics Business — 뷰티 공급망 연 $4.8B 폐기 (Avery Dennison 2022)https://cosmeticsbusiness.com/-4-8bn-of-beauty-products-is-wasted-in-brands-supply-chains-204793
- 11Beauty Independent — Highstock 인터뷰 (잉여재고의 터부)https://www.beautyindependent.com/highstock-beauty-brands-surplus-inventory/
- 12Osborne Clarke — 프랑스 AGEC 미판매품 폐기 금지 해설https://www.osborneclarke.com/insights/prohibition-destruction-unsold-non-food-products
- 13Anthesis — EU ESPR 미판매품 폐기 금지·공시 의무 해설https://www.anthesisgroup.com/insights/espr-the-ban-on-destruction-of-unsold-goods/
- 14FDA — MoCRA 시설등록·제품리스팅 집행 정책https://www.fda.gov/cosmetics/cosmetics-news-events/fda-issues-compliance-policy-cosmetic-product-facility-registration-and-cosmetic-product-listing